러시아·우크라이나 휴전협상이 교착상태에 머물러 있는 가운데, 러시아는 유럽 전구에 머물지 않고 인도태평양 전구로의 진입도 시도하고 있다. 국방전문매체인 제인스(Janes)에 따르면, 최근 러시아가 인도네시아 파푸아 지역 공군기지에 러시아 항공우주군 소속 군용기를 배치할 수 있도록 요청했다. 미국 해병대가 순환 배치되는 호주 다윈과는 불과 1200km 거리에 위치한 곳으로서, 호주는 금번 러시아의 요청에 대한 우려를 인도네시아 정부에 전달하였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러시아의 요청을 거절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이러한 상황을 연출한 것만으로도 러시아의 의도를 읽을 수 있다. 또한 이렇게 우려를 자아내는 러시아의 행동이 처음도 아니다. 미·중 경쟁 맥락에서 국제사회는 중국의 인도태평양 일대 공격적 해군력 강화 추이에 대해서만 우려해왔을 뿐, 러시아의 인도태평양 역내 진입 및 해군력 증강 추이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간과해왔다.

러시아는 구소련 시대 태평양 함대를 현대화하기 위한 투자를 늘려왔고 서태평양 일대에서 해군훈련도 개시했다. 러시아 해군은 북극해, 태평양, 흑해, 발트해 등 네 개 지역 함대와 카스피해 함대를 동시에 운용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볼 때, 최근 인도태평양 역내에서 활동 빈도와 수위를 높이는 것은 주목할 만한 사안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진행되는 상황 속에서도 러시아 태평양 함대는 인도태평양 역내에서 8회의 훈련을 실시했다. 2023년 러시아 태평양 함대는 인도네시아, 미얀마, 인도, 방글라데시, 태국, 캄보디아, 베트남, 필리핀 등을 순회하기도 했다.
이러한 러시아의 행보는 오래된 동진정책의 일환이라고도 볼 수 있으나,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에 대한 대응, 그리고 최근 미국이 시도하는 서태평양 일대 중거리미사일 배치, 오커스(AUKUS) 활동에 대한 대응으로도 볼 수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중·러 양국의 전략적 협력도 확대되고 있는데, 양국은 이미 북태평양 일대에서 해·공군 군사훈련을 해오고 있으며 한국과 일본의 방공식별구역과 영공까지 진입하는 사례도 늘어나고 있다.
한국의 입장에서 살펴보면, 이러한 러시아의 행보는 중국의 현상변경 행위에 힘을 실어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중국이 서해에 설치한 불법구조물, 중국 해상 민병대의 서해 진입, 중국 인민해방군 군용기의 한국 방공식별구역 진입에 이어, 이젠 이어도 해양과학기지 분쟁화까지, 중국은 서해 내해화를 다각도로 시도해왔다. 현상변경의 일상화, 기정사실화 전략에 기반한 그레이존 전략인데 이에 러시아가 동참하고 있는 셈이다. 국내 일각에서 간과하고 있는 점은 중국과 러시아에 서태평양은 하나의 전구로 인식되고 있다는 점이다. 한반도, 대만해협, 남중국해 분쟁이 따로 존재하는 분쟁이 아니며 이들을 유연하게 활용할 수 있다.
또한 북한과 중국, 러시아의 협력 수준은 영역별로 상이하나 서태평양에서 미국의 영향력 확대를 거부하고자 하는 이익은 상호 수렴하고 있다. 이에 따라 러시아는 한국과 일본, 호주 등 미국 동맹국들 간 관계를 약화시키려는 시도와 인도네시아와 같이 비동맹외교를 표방하는 국가들과의 제휴를 확대하려는 시도를 병행할 것이다. 특히 인도네시아와 같이 미·중 경쟁에 휘말리지 않으려는 국가에 오히려 차별적으로 접근하며 제휴를 시도할 것으로 보인다.
요컨대 인도태평양 내 전략경쟁은 더는 미국과 중국만의 경쟁이 아니다. 트럼프 행정부의 인도태평양 전략 구상이 지연됨에 따라 역내 동맹국의 우려는 커지고 있으나, 트럼프 대통령은 강대국 외교를 통해 이를 해결할 수 있는 것으로 믿는 듯하다. 현상변경이 일상화되는 인도태평양 안보환경 속에서 한국의 자율성은 균형외교가 아닌, 미국을 포함한 인도태평양 유사입장국들과의 협력을 통해서 그 기반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협력은 영향권 분할이 아닌 규칙기반질서 유지에 그 궁극적인 지향점을 설정해야 할 것이다.
정구연 강원대 교수·정치외교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