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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노동 선언’ 펴낸 김홍·오빛나리·안명희 “글쓰기도 노동… 생계 위한 최저 고료 보장 시급” [차 한잔 나누며]

기사입력 2025-04-30 20:52:03
기사수정 2025-04-30 23:5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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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노조 준비위 21명 공동 발간
계약서 후려치기 등 현실 꼬집어
“사업주에 종속 안 돼 보호 못 받아
현행법 이상의 새로운 협상 필요
우리의 힘으로 바꿔 나갈 수밖에”

예술인을 위한 최소한의 안전망으로 문화체육관광부가 마련한 ‘표준계약서’라는 장치가 있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출판사는 표준계약 이하의 ‘후려친’ 계약서를 작가에게 내민다. 원고청탁서에 원고료 지급 시기를 제시하지 않거나, 기한을 약속하고도 통보 없이 지급을 몇 개월 미루는 일도 허다하다. 일부 출판사는 계약도 체결하지 않은 작가의 이름을 홍보에 활용하거나, 저자에게 통보 없이 2차 저작을 팔아먹는다. 낭설이나 괴담이 아니다. 오늘날 한국 작가들이 자주 겪는 일이다. 4월 출간된 ‘작가노동 선언’(오월의봄)에는 글쓰기 노동만으로 밥 먹고 살기 힘든 작가들의 목소리가 빼곡하다. 

 

작가노조 준비위원회에서 활동하는 김홍(왼쪽부터)·오빛나리·안명희 작가가 지난 4월 23일 세계일보와 인터뷰를 하기 전 포즈를 취하고 있다. 최상수 기자

책은 노조 결성을 준비 중인 작가노조 준비위원회(준비위) 소속 작가 21명이 쓴 글을 묶었다. 2023년 태동한 준비위에는 박서련(소설)·황모과(SF)·은유(르포)·박권일(인문사회)·위래(웹소설) 등 다양한 장르의 작가 60여명이 모여 있다. 이들은 “누구나 생계와 존엄을 지키며 글을 쓸 수 있도록 최저 고료와 노동조건이 보장되는 구조의 설계가 시급하다”(은유)는 이유로 한 우산을 썼다. 책의 공저자이자 준비위 집행부 소속인 김홍(38)·오빛나리(32)·안명희(50) 작가를 최근 서울 용산구 세계일보 사옥에서 만났다. 

 

“상상력을 통해 작가의 노동자성을 규정하고 노동의 언어를 확대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안명희 작가를 비롯해 세 사람은 인터뷰 중 ‘상상력’이라는 단어를 여러 차례 언급했다. 노동법을 비롯한 기존의 법제도로는 작가의 노동을 설명하기 어렵기에, 확장된 의미의 노동을 상상하는 일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근로기준법상 근로자임을 입증하지 못한다고, 사업주에 종속돼 일하지 않는다고 작가들이 사회안전망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만큼 현행 노동법 체계를 뛰어넘는 새로운 협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노조의 역할도 마찬가지다. 단체교섭이라 하면 대개는 기업 내 교섭을 상정하기 마련이지만, 이들은 개별 사업장을 넘어서는 초(超)기업 교섭이 불가피하다고 말한다. “산업의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선 정부와 출판계, 사용자 단체 등 자본을 상대로 싸움을 벌여야 합니다.”(안명희) 구체적 단체교섭과 법제도 요구안을 마련하기 위해 준비위는 작가들의 목소리를 담는 대대적인 설문조사를 벌이고 있다. 

 

2016년 문단 내 성폭력 고발을 위한 고양예고 문예창작과 졸업생 연대 ‘탈선’ 대표를 지낸 오빛나리 작가는 작가노조 초대 위원장으로 선출됐다. 노조 내부의 위계를 들여다보고, 가장 약한 지위의 작가를 대변하겠다는 단체의 포부를 드러내는 선임이다. 오 작가는 “제가 가지는 상징이나 위치성이 작가노조가 갈 길을 보여주는 길이기도 하다”며 “작가 사회에 불공정과 부조리가 너무 많지만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고 미래, 정체성이라면 우리의 힘으로 바꿔 나갈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김홍 오빛나리 안명희 /2025.04.23 최상수 기자
김홍 오빛나리 안명희 /2025.04.23 최상수 기자

본업이 있는 상태에서 준비위를 맡다 보니 사실상 ‘열정페이’로 일한다. 작가노조가 출범해도 상근자를 두고 업무를 맡길 수 없는 형편이다. 소설 집필과 노조 활동을 병행하는 김홍 작가는 “글 쓰는 일은 본질적으로 고독한 업무이고, 그렇기 때문에라도 더 많은 사람이 작가노조의 깃발 아래 모여들었으면 하는 마음”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태처럼 도저히 있어서 안 될 일이 실제로 발생하는데, 힘들고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작가노조처럼 준비된 조직이 있어야 함께 목소리를 낼 수 있다”고 했다. 노조 활동 탓에 글 쓸 시간을 빼앗기지 않느냐는 질문에는 “하루 24시간 전부를 글쓰기에만 쓰지는 않는다”며 “쇼츠(짧은 영상)나 미드(미국 드라마)를 즐겨 보는 편인데, 그런데 시간을 쓰는 것보다 (준비위에서) 사람들을 만나 서로의 생각을 나누는 게 훨씬 좋다”며 웃었다.  

 

준비위는 작가들의 계약 관계 문제와 노동조건뿐 아니라 출판 생태계 전반의 이슈에도 대응할 방침이다. 당면한 이슈는 국내 최대 규모 책 축제인 서울국제도서전의 사유화 논란이다. 앞서 대한출판문화협회(출협)는 문체부와 수익금 정산 문제로 갈등을 겪은 뒤 10억원 규모의 독립법인을 설립하고 도서전을 운영한다고 밝힌 바 있다. 안 작가는 “도서전은 누구의 소유도 아닌 공공의 자산”이라며 “사유화 시도에 대해 개별 이해관계를 뛰어넘은 작가노조가 대응할 것”이라고 밝혔다.  

김홍 오빛나리 안명희 /2025.04.23 최상수 기자

 

이들은 작가들의 목소리를 담는 준비위의 설문조사에 많은 작가가 참여해줄 것을 당부했다. “솔직해졌으면 좋겠어요. 내 노동의 실체를 드러내야 요구사항도 명확해 질테니까요. 내 노동의 현실도 이야기하지 않고 그 어떤 요구도 하지 않으면 현 상태는 지속될 겁니다. 작가노조는 모든 작가에게 문이 활짝 열려 있습니다. 좋은 사람들이 모여 필요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는 것을 보여 드릴게요.”


이규희 기자 lkh@segye.com